황석영 비극 / 의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거시적 안목과 소설의 소재와 구성이 뒤얽히는 것은 기본이고 사물과 풍경은 물론 마음의 갈등을 표현한 어휘력이 일필휘지처럼 현란하기 때문이다.

근처 도서관에 갔더니 책이 대출되어 학생들의 논술용 버전으로 읽었다.
캠프를 간 사이에 드문드문 읽게 되었다.

줄거리 출처 : 알라딘 http://aladin.kr/p/YFTNJ70 년대 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하던 오현우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지명수배가 되자 기약 없는 도피생활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은거를 도왔던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이들은 한적한 시골 카르메 외딴 마을에서 3개월여 동안 둘만의 따뜻하고 아늑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투쟁의 길로 나서는 과정에서 검거되고 만다.
그는 지하조직의 수괴로 몰려 무기형을 선고받고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장기수로 지내며 옥중투쟁을 거듭하는 한편 신산했던 수많은 삶과 맞물리면서 내면적으로 성숙해 간다.

만기 출소 후 전해진 한윤희의 편지를 통해 오현우는 그가 불치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다.
오현우는 한윤희에 대한 추억을 찾아 과거 둘이 함께 지냈던 카르메의 옛 정원을 찾고, 거기서 한윤희가 남긴 기록을 통해 험난한 80년대 이후를 뜨겁게 살아온 그녀의 삶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오현우와 헤어진 뒤 미술대학원에 진학한 한윤희는 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갖고 송영태라는 학생운동가가 주도하는 반정부 운동을 음양에서 지원하고 독일로 유학해 그림 공부를 계속한다.
한윤희는 그곳에서 또 다른 인물 이희수를 만나면서 친환경적인 생각에 공감하게 되고 결국 뜻하지 않은 사랑에 빠지지만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해진다.

다시 실의에 빠진 그녀는 작품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다.
반면 오현우는 한윤희의 기록을 통해 그가 자신의 딸을 낳아 키워왔음을 알게 된다.
오현우는 갈매에서의 여정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준비하면서 딸을 만나는 설렘을 가슴에 묻어두고 서울로 올라온다.

생각하는 주인공 오현우와 한윤희의 1인칭 시각에서 교차하는 편지 형식의 전개가 박진감 넘친다.
군부독재의 암울한 시대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희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대의 분위기에 맞게 지하에서 진행하는 학생들의 운동은 황석영의 또 다른 장편소설 ‘철도원 3대’처럼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연상시킨다.
목적 달성을 위해 위장취업이 이뤄졌을 때는 그 소설을 읽고 곧 오버랩되기도 했다.

남자 주인공 오현우의 18년 감옥 생활과 여주인공 한윤희가 독일에서 맞이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은 실제 작가가 겪은 것을 고스란히 소설의 무대로 옮겨 더욱 실감난다.
두 주인공이 꼭 3개월간의 짧은 연애로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실혼 생활을 하고 있다.

바로 그곳이 카르메인데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맺는다.
카르메이가 그들의 이상향 유토피아에서 둘이 살면서 가꾼 정원을 소설 제목으로 차용한 모양이다.

두 애인 중 남자는 정치범 무기수로 복역하고 여자는 임신한 딸을 낳고 여동생에게 맞아 질곡의 시대를 맞으며 살아가지만 결국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서술이 너무 잔인해 작가가 얄밉기도 하다.
그럼에도 생전에 윤희가 형우에게 남긴 편지나 일기가 뒤늦게 출소한 형우가 윤희의 발자취와 혈육의 딸 은결이와 전화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하게 되면서 작가의 의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멀었던 암울한 시대에는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삶 자체가 어디로 흐를지 몰라 희생양이 되는 개인의 삶에 책을 읽는 동안 안타까움이 없지 않다.
동시대를 살아왔기에 소설이 더욱 폐부 깊숙이 다가온다.

밑줄 치는 한 남자의 아내 노릇도, 아이의 어머니 노릇도 못한 거죠. 40대가 돼서야 어머니가 되고 싶었는데 모성을 어렴풋이 살피자니 모성 자체를 송두리째 빼앗는 병에 걸리다니 인생은 참 묘해요. 당신이 제가 쓴 갈매노트를 다 읽고 나면 은결이가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을 따님에게 모두 가르쳐 주시고 베풀어 주십시오.당신도 이제 나이가 들었잖아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텨온 가치는 산산조각 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들은 속세의 먼지 속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고독하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바위틈으로 난 길을 걸어가다가 찬란한 햇빛 속에서 갖가지 빛깔의 꽃이 만개한 세상을 보셨을 거예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발견했습니까?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곳 밖에서 하나의 세계를 보냈습니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날들과 화해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여보.(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윤희가 형우에게 쓴 마지막 노트)

눈을 감으면 지금은 사라진 계절의 풀꽃들이 눈꺼풀을 스친다.
아침 냉랭한 이슬에 발목을 적시며 밭자락을 지나가다 보면 초록 초목 사이로 간신히 고개를 내민 벚꽃이 피었다가 사라진다.
엉겅퀴는 바람 속에서 털처럼 많은 꽃심을 떨고 있다.
억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서 너울거린다.
푸드덕거리며 까치가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오른다.
까치가 앉은 감나무 둥치에 윤희가 기대어 서 있다.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눈앞에 쇠창살이 드리워진다.
철조망을 친 하얀 벽 위로 탐조등이 밝게 빛나고 윤희가 그 아래 서 있다.
누군가 변소 창가로 나와 수십 번이나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는 숨죽인 듯한 목소리로 부르다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부르기를 반복한다.
눈을 뜨면 흑백사진이 사라진다.
(형우가 둘만의 추억이 담긴 갈매에서 윤희의 노트를 모두 읽고 떠나려는 순간을 그렸다)